촨디샤 마을(爨底下村, 찬저하촌) 이 곳은 명, 청나라 시대 양식의 건축물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곳은 당시의 민가를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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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추천유람시간:
3-4시간촨디샤 마을(爨底下村 爨白景区)은 베이징 시내와는 90킬로미터 떨어진 베이징시 먼터우거우구 자이탕(斋堂镇, 재당진)에 위치해 있으며, 109번 국도를 이용하면 도착할 수 있다. 이 곳은 명, 청나라 시대 양식의 건축물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곳은 당시의 민가를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명나라 영악(永乐) 기간(1403~1424)에 짓기 시작한 촨디샤(爨底下, 찬저하)는 산시(山西, 산서)에 살던 주민들이 베이징으로 이주해오는 것에 맞춰 건립되었다. 촨디샤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은 한씨 성을 가지고 있는데, 마을에 보관되어 있는 “쭈셴탕(祖先堂, 조선당)”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한씨는 제1대손인 한복금(韩福金), 한복은(韩福银), 한복창(韩福仓)의 후예이다. 그들의 대손을 차례대로 열거하자면 복(福), 경(景), 자(自), 수(守), 옥(玉), 유(有), 명(明), 만(万), 굉(宏), 사(思), 의(义), ...
촨디샤 마을(爨底下村 爨白景区)은 베이징 시내와는 90킬로미터 떨어진 베이징시 먼터우거우구 자이탕(斋堂镇, 재당진)에 위치해 있으며, 109번 국도를 이용하면 도착할 수 있다. 이 곳은 명, 청나라 시대 양식의 건축물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곳은 당시의 민가를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명나라 영악(永乐) 기간(1403~1424)에 짓기 시작한 촨디샤(爨底下, 찬저하)는 산시(山西, 산서)에 살던 주민들이 베이징으로 이주해오는 것에 맞춰 건립되었다. 촨디샤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은 한씨 성을 가지고 있는데, 마을에 보관되어 있는 “쭈셴탕(祖先堂, 조선당)”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한씨는 제1대손인 한복금(韩福金), 한복은(韩福银), 한복창(韩福仓)의 후예이다. 그들의 대손을 차례대로 열거하자면 복(福), 경(景), 자(自), 수(守), 옥(玉), 유(有), 명(明), 만(万), 굉(宏), 사(思), 의(义), 거(巨), 효(晓), 회(怀), 맹(孟), 영(永), 무(茂), 광(广), 련(连), 문(文) 순으로 총 20대손으로 현재 17대손까지 번성했다.
촨디샤가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명나라 정덕(正德) 14년(1519년) 구이다오(古驿道, 고역도)의 건설이다. 이는 허베이(河北, 하북), 산시(山西, 산서), 네이멍구(内蒙古, 내몽고)를 왕래할 때 필히 거쳐야 할 길이기에 군사적으로나 대외교류 및 발전에 있어서 가치가 높았다. 따라서 촌락의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촌락의 환경을 구성하는 70여 채의 정밀하고 다채롭게 지어진 산지 쓰허위안(四合院, 사합원)은 당시 고대 산촌 경제 번영의 상징이 되었다.
고대 촌락은 종족, 혈연의 유지를 중요시해 촌민들에게 애가애국(爱家爱国) 사상과 윤리도덕 규범을 감화시켜왔다. 따라서 촌민은 일정한 문화적 소질과 보국헌신(报国献身)의 정신이 대대로 이어져 왔으며, 한씨 자제가 중일갑오해전(中日甲午海战)에서 공을 세웠던 소식은 지금까지 촌락 내에서 미담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따라서 촌민들에게는 국가에 대한 열정적이면서 충실한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촌락을 침략했을 당시 촌락 내 있는 총 108채의 집에 살던 주민들 중 70여명의 청년들이 참전하였으며, 참전 인원들 중 34명은 순국했다. 나머지 30여 명도 군의 여러 전투에 참전함으로써 애가, 애국의 민족정신을 보여주었다.
해방 후에는 펑사셴(丰沙线, 봉사선) 철도와 109번 국도의 개통과 더불어 촨디샤 구이다오가 가지고 있던 이점이 사라지면서 상품 교역의 중심지에서 농업 생산이 주가 되는 소규모 산촌으로 변했다.
촨디샤는 여러 왕조의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촌락 내에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각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는 역사의 유물로 빛을 발하고 있다.
20세기 80년대 들어 산촌 경제가 곤궁해짐에 따라 다수의 청년들이 도시로 나가 지식을 배우고 정착했다. 따라서 마을 내에는 13채 집, 30여 명밖에 남지 않아 이전의 번화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경제가 쇠퇴함에 따라 촌민들은 마을의 재개발을 막을 힘이 없었고, 이에 따라 이전의 풍채와 전원 환경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 그나마 고대 촌락이 가지고 있는 역사 문물로서의 진귀한 가치를 인정받아 일부는 보존되어 있는 상태다. 이들은 이미 베이징 서부에서 문물 보호 가치와 관광 개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인문 계열의 관광자원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촌락은 첩첩한 산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지형의 높낮이 변화에 따라 지어진다. 그 중에서 룽터우(龙头, 룡두)산을 중심으로 남북 중심축을 따라 만들어진 76채의 쓰허위안은 아주 정밀하고 오묘하다. 이들은 정해진 터전 안에서 산세의 높낮이 변화에 따라 상하층으로 나뉘고, 부채꼴 모양으로 아래를 향해 뻗어나가는 등 지형에 최적화시킨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건축물의 배치 역시 빈틈없이 조화로워 질서 정연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말 그대로 촌락의 전체적인 배치가 하나의 귀한 금괴를 연상시키며, 웅대한 기백을 느끼게 한다.
* 2009 년 인근 마을들과 통합하여 촨바이 관광지(爨柏景区)로 지정되었다.
촨바이관광지는 유명한 중국역사문화마을인 촨디샤(爨底下)를 비롯하여, 솽스터우(双石头), 바이위춘(柏峪村), 황링시춘 (黄岭西村) 마을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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