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녕궁은 내정 후삼궁의 하나다. 명 영락18년 (1420年)에 처음 건설되고, 정덕9년 (1514年)과 만력24년(1596年)에 두 차례 화재가 났으며, 만력 33년(1605年)에 재건했다.
곤녕궁은 내정 후삼궁의 하나다. 명 영락18년 (1420年)에 처음 건설되고, 정덕9년 (1514年)과 만력24년(1596年)에 두 차례 화재가 났으며, 만력 33년(1605年)에 재건했다.
청나라는 명의 제도에 따라 순치2년 (1645年)에 재건했으며, 순치12년(1655年)에는 심양의 성경청녕궁(盛京清宁宫)을 모방하여 다시 재건했다. 가경2년 (1797年)의 건청궁(乾清宫) 화재 시에 불길이 곤녕궁 처마까지 들이닥쳤으며, 가경3년 (1798年)에 재건했다.
곤녕궁은 남향으로, 면적은 복도를 합쳐서 폭이 9칸, 깊이는 3칸이며, 황색유리기와 겹처마 무전정 형식이다. 명나라 시기에는 황후의 침궁이었다. 청 순치12년에 개조 후에는, 샤머니즘 (萨满教) 제사의 주요 장소가 되었다.
원래 명간(明间)의 문을 개조하여 동차간에 문을 설치하고, 원래 격선문(槅扇门)을 쌍선판문(双扇板门)으로 개조했으며, 기타 령화격선창(棂花槅扇窗)을 모두 직령앙탑식창(直棂吊搭式窗)으로 개조했다.
실내 동측의 두 칸...
곤녕궁은 내정 후삼궁의 하나다. 명 영락18년 (1420年)에 처음 건설되고, 정덕9년 (1514年)과 만력24년(1596年)에 두 차례 화재가 났으며, 만력 33년(1605年)에 재건했다.
청나라는 명의 제도에 따라 순치2년 (1645年)에 재건했으며, 순치12년(1655年)에는 심양의 성경청녕궁(盛京清宁宫)을 모방하여 다시 재건했다. 가경2년 (1797年)의 건청궁(乾清宫) 화재 시에 불길이 곤녕궁 처마까지 들이닥쳤으며, 가경3년 (1798年)에 재건했다.
곤녕궁은 남향으로, 면적은 복도를 합쳐서 폭이 9칸, 깊이는 3칸이며, 황색유리기와 겹처마 무전정 형식이다. 명나라 시기에는 황후의 침궁이었다. 청 순치12년에 개조 후에는, 샤머니즘 (萨满教) 제사의 주요 장소가 되었다.
원래 명간(明间)의 문을 개조하여 동차간에 문을 설치하고, 원래 격선문(槅扇门)을 쌍선판문(双扇板门)으로 개조했으며, 기타 령화격선창(棂花槅扇窗)을 모두 직령앙탑식창(直棂吊搭式窗)으로 개조했다.
실내 동측의 두 칸은 난각(暖阁)으로, 거주하는 침실로 하였으며, 문의 서측 네 칸에는 남북서 삼면에 구들(炕)을 설치하고, 신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삼았다. 문 맞은 편의 후처마에는 부뚜막(锅灶)을 설치하여, 제물(돼지)을 준비하는 용도로 하였다. 황실에서 사용하는 곳이었기에, 부엌(灶间)에도 령화선문(棂花扇门)을 설치하고, 장식은 매우 화려했다.
곤녕궁의 개조건설 후에, 청 궁궐의 샤머니즘 제사의 주요 장소가 되었으나, 그중 궁의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강희4년(1665年) 현엽(玄烨 강희제) 혼례 시에, 태황태후는 곤녕궁에서 예식을 할 것을 지정했다. 동치 황제, 광서 황제의 혼례, 부의의 결혼도 모두 곤녕궁에서 거행하였다. 옹정 이후, 황제가 양심전(养心殿)으로 이주하면서, 황후 역시 곤녕궁에서 다시 머물지는 않았으며, 곤녕궁은 실제적으로 샤머니즘 제사의 전용 장소가 되었다.
현재 궁궐생활 원상 진열 전시 중이다.
(번역편집 김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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